금박은 그 이름만으로도 찬란하고 귀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화려한 전통 혼례복이나 사찰의 불화, 고서의 표지, 그리고 왕실의 용포에 얹힌 금빛 장식들 뒤에는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장인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금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전통의 상징이자 권위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성까지 상징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금빛 기술을 지켜온 장인들의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오늘도 낡은 목공책상 앞에서 조용히 마지막 금박을 찍고 있습니다.
서울 변두리의 한 허름한 골목 안쪽에 외부 간판조차 없는 작은 공간에서 80세가 넘은 김진오(金振吾) 장인은 조용히 금박지를 자르고 있습니다. 그는 50년 넘게 금박을 전문적으로 작업해 온 장인이자 현재 국내에서 전통 금박 기법을 독학으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의 손에는 매일같이 금잎이 쌓이고 바람에도 날아갈 듯한 얇은 금박 한 장을 다루는 솜씨에는 긴 세월이 만들어낸 감각이 녹아 있습니다.
전통 금박 장인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김진오 장인이 금박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어느 사찰 불화 복원 작업장에 인부로 일하면서 금박 장인의 손길을 처음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종이에 금이 입혀지는 순간 그는 손끝에서 빛이 나는 기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정식 스승도 없이 혼자 금박의 세계에 발을 디뎠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금박을 찢어먹으며 익힌 기술을 이제는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인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금값이 오르면 재료비 부담에 작업을 멈춰야 했고 계절의 습도나 기온에 따라 실수 없이 금박을 붙이려면 새벽부터 일어나 작업실의 온도와 습도를 맞춰야 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지루해하지 않았습니다.
금박을 붙이는 순간은 아직도 가슴이 뛸 정도로 설렌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직업인이 아닌 장인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여전히 매일 작업실에 나갑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작품이 없어도 팔 곳이 없어도 금박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호흡이자 일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전통 장인들의 묵묵한 삶이 바로 전통 직업의 마지막 경계선일지도 모릅니다.
미세함의 미학 전통 금박
전통 금박 작업은 말 그대로 미세함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 금박 작업에 사용하는 금은 99.9% 순금으로 1g의 금을 망치와 죽절나무 도구로 두드리고 눌러 머리카락보다도 얇게 만들어 냅니다. 이 얇은 금박은 종이 위에 얹히는 순간에도 손의 열기나 숨결에 찢어지거나 휘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 금박 장인은 손끝 온도와 습도 기운의 흐름까지 통제하며 작업을 합니다.
금박지는 아무나 만들 수 없습니다.
김 장인은 전통 방식 그대로 닥종이를 기름에 적셔 반년 이상 말린 뒤 그 위에 금을 눌러서 박을 만듭니다. 현대식 기계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이 수작업은 종이 한 장을 완성하는 데도 수십 번의 건조와 압착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숙련도가 부족하면 금박이 고르게 펴지지 않거나 찢어져버려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전통 금박 장인의 작업은 예술과 수련 사이를 오가는 일입니다.
더욱이 금박은 단순히 금을 붙이는 일이 아니라 붙이는 순간이 전부입니다. 금을 고르게 올린 뒤 송진과 물감, 찰흙으로 만든 접착제를 이용해 작업 대상 위에 가볍게 올리면 찰나의 정적 속에 황금빛이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 한순간의 정적을 위해 장인은 하루 종일 호흡을 조절하고 집중을 갈무리합니다.
전통 금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우리가 금박을 화려한 치장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전통 금박은 사회적 상징성과 문화적 위계를 동시에 지닌 코드였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나 문무백관의 관복 그리고 불경과 불화의 경전에도 금박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적 장치가 아니라 신성함과 권위, 정통성을 의미하는 시각적 언어였습니다.
특히 불교에서 금박은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신성한 색으로 여겨졌고 불상과 탱화 사경(寫經) 작업에는 반드시 순금박이 사용되었습니다. 금은 변하지 않는 속성으로 인해 영속성과 신성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재료였기에 종교적으로도 미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금박은 단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의 상징적 기호 체계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전통 금박 장인의 기술은 공예를 넘어선 정신의 계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통 금박의 현대적 재해석
전통 금박이 반드시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는 일부 디자이너와 장인들이 협업해 금박을 활용한 현대 디자인 상품과 한복 액세서리 예술 작품 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금박의 상징성과 예술성을 접목해 한지공예, 북디자인, 인테리어 소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용도 모색되고 있습니다.
김 장인 또한 몇몇 현대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전통이 현재에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습니다. 2023년에는 한 미술관 전시에서 전통 금박과 현대 설치미술이 결합된 작업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전의 재현이 아니라 전통 기술이 시대에 따라 새롭게 읽히고 응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실험이었습니다.
금박 장인의 기술은 단순한 장식 기법이 아니라 재료를 극한까지 활용하고 인간의 손 감각을 극대화하는 훈련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 어느 산업에서도 응용될 수 있는 고유한 인간 중심 기술입니다. 만약 이 정밀함과 감각이 다양한 플랫폼과 연결된다면 금박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다음 세대가 전통 금박을 만날 수 있도록
지금도 김진오 장인의 손끝에서는 금빛이 피어납니다. 그의 작업대 위에는 미완성된 박지들과 사용한 붓, 낡은 종이칼 그리고 접착제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수첩이 놓여 있습니다. 그 수첩에는 작업 순서와 조율 방법 온도 변화에 따른 재료의 반응 등 수십 년 간의 기록이 손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거 책으로도 못 배우는 거요. 손이 익히고 마음이 받아야 되는 기술이지
이러한 장인의 기록이 단지 한 개인의 유산으로 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후계자가 없다고 기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통 기술의 가치를 알리는 사람이 줄어들면 전통 기술은 점차 잊힙니다.
전통 금박 장인의 삶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손끝에 담긴 금빛은 누구보다 찬란하고 우리는 그 빛을 지켜내야 합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손으로 만들어낸 아름다움과 정교함의 가치는 결코 바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통 직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입니다.
기술은 살아 있는 사람들 안에서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전통 금박 장인의 마지막 작업실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의 삶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가 향하는 방향을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 질문에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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