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본래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글자가 없던 시절부터 인간은 말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타인의 삶을 기억했으며 공동체의 지혜를 전했습니다. 이야기는 공동체의 정신적 유산이자 감정을 공유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야기꾼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기수(傳奇叟)나 각설이 혹은 마을 어르신이 그러한 역할을 했고 해외에는 아프리카의 이야기꾼 그리오와 켈트 문화권의 음유시인 바르드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꾼이 존재했습니다.
한국의 전통 이야기꾼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닌 공연자이자 기억의 보관자였습니다. 서민들이 문자를 배우지 못하던 시절 이야기꾼은 구비문학의 전령사로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설화를 들려주고 민요를 부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삶의 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목소리 하나로 청중의 마음을 울리고 때로는 웃기며 때로는 눈물짓게 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되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꾼의 등장은 늘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기 충분했습니다. 장터 한복판 마을 우물가 혹은 넓은 마당 한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판은 하루 일과가 끝난 사람들에게 쉼이자 축제였습니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람들은 일찍 모였고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한 데 모여 이야기 속 세상에 빠져들었습니다. 전통 이야기꾼은 그 모든 시선을 하나로 끌어당기고 목소리로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이야기꾼은 단순한 말재주꾼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문화예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미디어 발달 이후 이야기꾼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고 오늘날에는 그 명칭조차 생소해진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말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다시금 회복하기 위해 이들 전통 이야기꾼의 존재를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의 예술, 이야기의 구조와 전통 이야기꾼의 기술
전통 이야기꾼의 기술은 단순히 많은 이야기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끌고 가며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에 따라 청중의 몰입도는 달라집니다. 이야기꾼은 단어 하나 말투 하나 음성의 높낮이 그리고 몸짓과 시선의 움직임까지도 세심하게 조절하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목소리는 곧 악기였고 말은 선율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판소리의 소리꾼이 이야기를 창으로 풀어가듯 이야기꾼도 말에 리듬을 실었습니다. 특히 입말 특유의 강조와 반복 청중의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은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와 같이 반복적으로 쓰이는 도입부는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청중에게 상상의 문을 열어주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꾼은 언제나 청중과의 호흡을 중시했습니다. 청중의 표정과 반응을 읽고 이야기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였으며 때로는 즉흥적으로 내용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런 즉흥성은 이야기꾼의 진가가 드러나는 지점으로 같은 이야기도 이야기꾼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와 감동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변형시키는 능력은 단순한 암기와 구분되는 창의적 서사 능력이며 바로 이 점에서 이야기꾼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구성자이며 예술가였습니다.
또한 이야기꾼은 단지 옛이야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 이웃의 이야기 왕의 소식까지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어 전했습니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정보를 담는 그릇이었고 이야기꾼은 그 그릇을 들고 사람 사이를 오가는 존재였습니다. 즉 이야기꾼은 공동체의 역사와 정서를 기억하고 그것을 말이라는 형태로 기록해 낸 구술 사학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전통 이야기꾼의 사회적 역할과 문화적 의미
전통 이야기꾼은 단순히 이야기하는 사람을 넘어서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해설자였으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규범을 말로써 지켜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야기꾼이 전하는 전설이나 민담 속에는 선과 악의 기준 가족과 이웃의 의미 자연과 인간의 관계 등 수많은 가치가 녹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 인물의 선택과 결과를 통해 스스로를 비추었고 무언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예컨대 흥부와 놀부, 심청전, 춘향전과 같은 고전 설화들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그 시대 사회의 불합리함 인간 본성 그리고 희망을 다루는 이야기로 기능했습니다. 이야기꾼은 이를 현실에 맞게 각색하여 전달하며 그 시대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이야기 속에서 여성 노인 아이 천민 등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기존 권력 중심의 역사에서 배제된 목소리를 드러내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야기꾼은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공감을 자아내며 공동체의 심리를 정화하는 기능도 수행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고된 삶에 지쳤을 때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희망과 용기의 서사는 큰 위로가 되었고 때로는 웃음 한 줄기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속 이야기는 곧 삶의 안내서였고 이야기꾼은 그 안내서를 직접 소리로 읽어주는 길잡이였습니다.
한편 이야기꾼은 특정 집단이나 신분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유랑 예인으로 어떤 이는 마을의 평범한 노인으로 또 어떤 이는 무당이나 승려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 존재했고 그러한 다양성은 우리 구비문학과 민속 문화의 풍요로움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야기꾼은 곧 사람 자체였으며 그가 가진 경험과 언어 삶의 시선이 곧 이야기의 질과 넓이를 결정했습니다.
전통 이야기꾼의 오늘과 내일, 전통의 회복과 재해석
오늘날 전통 이야기꾼은 거의 사라진 직업이 되었습니다.
대중매체 인터넷 영상 플랫폼이 이야기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입말 문화는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검색하거나 클릭하여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전통 이야기꾼의 존재는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묻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통 이야기꾼의 방식을 현대 공연예술과 결합하여 무대화하거나 어린이 교육 콘텐츠로 변형하여 아이들의 감성 교육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야기 속 지혜와 윤리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풀어내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지역을 이야기 문화마을로 조성하여 지역 노인의 구술을 기록하고 이야기꾼 교육을 진행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꾼이 다시 주목받기 위해서는 단지 옛 방식을 그대로 보존하려 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가치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전통 이야기의 유머 풍자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디지털 매체나 연극 애니메이션 오디오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전통 이야기꾼의 정신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다시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전통 이야기꾼은 단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매개로 공동체를 묶고 감정을 공유하게 했던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함께 듣고 웃고 울고 공감하던 그때의 시간 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다시 이야기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은 변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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