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직업

손끝에 기록된 신앙과 시간 에티오피아 전통 필기도구 제작 장인의 세계

funyoung 2025. 7. 11. 07:00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로 고대 왕국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독자적인 문자와 문서기록 문화가 존재합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게에즈(Geez)라는 고대 셈어계 언어가 있습니다. 이 언어는 더 이상 구어로는 사용되지 않지만 에티오피아 정교회(Ethiopian Orthodox Tewahedo Church)의 공식 전례 언어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전통 필기 도구 제작 장인의 세계


게에즈
문자로 기록된 성서와 교회 문서, 신학적 기록은 오로지 수작업 필사를 통해 전해져 왔고 이러한 기록 문화의 이면에는 특수한 필기도구를 제작하는 장인이 존재해 왔습니다.

이 필기도구는 펜촉, 잉크, 파치먼트(동물 가죽을 가공한 종이), 잉크통, 휴대형 서판 등으로 구성되며 그 제작 방식은 기계화된 현대 문명과는 달리 철저히 수공 중심의 감각 노동입니다. 특히 펜촉은 대나무 또는 갈대를 자르고 끝부분을 일정한 각도로 잘라 글씨의 굵기나 흐름에 맞춰 날카롭게 다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만 완성됩니다. 한 명의 필경사가 필사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손에 꼭 맞는 필기도구를 사용해야 했기에 이 도구의 완성도는 필사 작업 전체의 질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이렇게 에티오피아의 필기 문화는 단지 문자의 기록 기술을 넘어 정신과 신앙, 시간의 흐름을 손으로 새기는 행위였고 그 기반을 형성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를 지키던 전통 필기도구 제작 장인의 기술이었습니다.

 

필기도구 제작이 이루어진 사회적 배경과 종교 중심의 문화 구조

전통 필기도구 제작이라는 전통 직업이 생겨난 배경에는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교육, 행정, 문서 관리의 중심 역할을 해온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특히 중세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에티오피아는 외부 식민 지배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은 아프리카 국가로서 고유한 종교 체계와 문서 행정 구조가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 수행의 공간을 넘어서 교육과 기록, 예술, 기술 전승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고 이러한 배경으로 수도원 내에서 성서를 필사하거나 경전 기록을 담당하는 이들을 위해 전용 필기도구를 제작하는 장인의 역할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전통 직업은 세속의 시장 경제와는 단절된 상태에서 오직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만 유지되어 왔으며 대부분의 장인은 수도사이거나 수도원과 연관된 가족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보통의 전통 직업 장인들과 달리 세속의 직업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대가 없이 수행하듯 도구를 제작하거나 교회에서 소량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작업을 지속해 왔습니다.

또한 이 전통 직업은 신앙적 헌신을 전제로 한 신성한 노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돈벌이 수단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도구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게 했고 한 자루의 펜과 한 병의 잉크조차도 성물처럼 다뤄지게 만든 문화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전통 필기도구 제작 장인의 기술과 감각의 전승

에티오피아의 전통 필기도구는 단지 만들어진 물건이 아닙니다. 그 도구를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자 기술의 응축이고 감각의 기억입니다.
전통 필기도구 제작 장인들은 보통 어릴 때부터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스승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습니다. 이 과정은 정식 교육보다는 반복과 관찰, 몸의 기억을 중심으로 한 도제식 전승입니다.

가장 중요한 과정은 필기용 펜의 제작입니다. 이는 대나무나 갈대를 일정한 길이로 자르고 끝을 날카롭게 가공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펜촉의 두께와 각도, 잉크 흡수 속도는 쓰는 사람의 손의 힘과 글씨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전통 필기도구 장인은 해당 필경사의 쓰기 습관에 맞춰 개별 맞춤형 도구를 제작합니다.

이러한 맞춤 과정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교감이 필요하며 쓰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사이의 정서적 신뢰가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또한 잉크 제작에는 탄화 나무, 식물성 유액, 광물성 안료 등이 사용되며 이 재료들을 혼합하고 숙성시키는 비율과 순서는 정확한 수치로 설명되지 않고 세대별 장인의 경험을 통해 감각적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이 기술은 문서화되기 어렵고 장인의 손에서 장인의 손으로만 전해지는 유산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전통 필기도구를 둘러싼 문화적 상징성과 정신적 가치

에티오피아 전통 필기도구는 단순한 쓰임새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성서를 기록하고 공동체의 기억을 남기며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문화적 매개체이자 종교적 상징으로서 역할을 해 왔습니다.

특히 수도원 내부에서 제작된 펜과 잉크는 단순한 공예품으로 분류되지 않았습니다. 그 물건 하나하나에는 장인의 정성과 종교적 헌신 그리고 공동체의 의례와 일상의 리듬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용하는 필경사 역시 도구를 하나의 성물처럼 대하며 그 사용 자체가 기도의 연장선이자 수련의 일부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물질적 가치와는 다른 세계에서 기술을 초월한 감각의 철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도구 자체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그 도구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 또한 하나의 종합적인 문화 행위로 작동한 것입니다.

이처럼 전통 필기도구는 단순히 옛 방식의 생산물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 체계, 인간관, 시간관, 신앙관이 통합된 복합적인 문화 구조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통 직업을 지키는 일은 단지 물건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을 후대에 잇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 끊기면 문화도 끊긴다 전통 필기도구 장인의 위기와 고립

현대 사회의 변화는 전통 직업군을 급격하게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전통 필기도구 제작 장인 역시 이러한 변화의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한때 공동체의 중심에서 기능하던 이들의 기술은 이제는 일부 수도원 안쪽에서만 근근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조차도 제작자가 60세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단순히 기술 인력의 고령화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장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는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도원 내부의 전통 교육 시스템은 외부 청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폐쇄성을 띠고 있어 새로운 세대가 기술을 배우고 계승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장벽이 존재합니다.

또한 이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서는 최소 수년간의 집중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며 제작한 결과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젊은 세대가 이 길을 선택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처럼 기술의 단절은 단순히 직업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직업이 담고 있던 철학, 삶의 방식, 공동체의 기억까지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통 필기도구 제작 장인의 위기는 곧 에티오피아 전통 지식 체계 전체의 균열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 필기도구 제작 기술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

전통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보존을 넘어 지속적으로 쓰이고 응용되어야 합니다.
에티오피아 전통 필기도구 역시 단지 종교적 전례 도구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해석되어야만 그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예술 작품 제작, 전시 콘텐츠 구성, 공예 수업, 국제 교류 프로그램 등을 통해 도구 자체의 쓰임새보다는 기술이 담고 있는 문화적 의미와 미학적 가치를 전달하는 방식이 시도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에티오피아 수도원에서는 전통 필기도구 제작 과정을 외국 방문자들에게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장인의 작업 모습을 촬영하여 디지털 콘텐츠로 제작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의 박물관이나 아프리카 전문 인류학 연구기관에서는 이 도구들을 단지 종교 유물로서가 아니라 감각적 전승의 대표 사례로 기록하고 있으며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사전 조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지만 기술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문 하나가 열리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은 여전히 살아 있는 손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이라도 기록하고 배우고 연결한다면 잊혀질 뻔했던 이 전통은 다시 미래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