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직업

전통 서각 장인이 목판에 새긴 역사

funyoung 2025. 7. 14. 16:44

우리가 책을 펼치면 당연하게 마주하는 활자들 그러나 인쇄 기술이 대중화되기 전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먼저 나무에 글자를 새겼습니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파낸 글자들이 나무판 위에 빼곡히 들어차고 그 판에 먹을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 그것이 바로 전통 서각(木版印刷)의 세계입니다.

목판에 새겨진 전통 서각 장인의 삶

 

이 작업을 오롯이 해내는 사람이 바로 전통 서각 장인이며 그들은 시간을 조각하고 손끝으로 역사를 인쇄하는 사람들입니다.

서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닌 철저한 언어 해석과 문장의 흐름, 판면 구성 그리고 나무 결의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가능한 작업입니다. 잘못 새기면 전체가 버려질 수 있기 때문에 오차를 용납하지 않는 집중력이 요구됩니다. 그렇기에 서각 장인은 한평생 수천수만 자의 글을 새기면서도 한순간의 오만함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무 위에 칼을 대는 순간부터 이들의 정신은 오롯이 고요하게 글을 새기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됩니다.

 

나무판에 새긴 삶과 종교 그리고 공동체의 이야기

한국의 전통 서각은 단순한 텍스트 인쇄 수단이 아닌 정신과 신념을 시각화한 수단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려대장경을 포함한 불경 판목들은 서각 기술의 집대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조선 시대에는 민간에서 족보나 의서 유교 경전 등을 인쇄하는 데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지방의 향교나 사찰, 서원 등에서 서각 장인은 단순한 기술자를 넘어 지식의 보관로서도 역할을 했습니다.

서각판은 대개 오동나무나 배나무 같이 단단하고 결이 고운 목재를 사용하여 글자를 정렬하는 먹그림 작업을 거쳐 각자의 결을 따라 정교하게 새긴 후 평탄하게 면을 다듬습니다. 판목 하나에는 수십 자에서 수백 자의 문자가 담기는데 그 배치와 깊이는 인쇄 상태에 직접 영향을 끼칩니다.

장인은 단순히 글씨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시각적 구조로 재해석하는 예술적 감각을 발휘합니다. 이러한 서각 판들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넘어 그 자체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닙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판화들은 장인의 손기술과 조형감각, 시대적 문맥을 모두 함축하고 있으며 단순한 목판을 넘어 시간을 새긴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조용히 꺼져가는 손의 기억 사라져 가는 전통 직업

하지만 이처럼 가치 높은 전통 직업인 서각 장인은 오늘날 가장 빠르게 사라지는 기술 보유자 중 하나입니다.

디지털 인쇄 기술 발달과 문서의 전산화는 손글씨조차 보기 어려운 시대를 만들어냈고 손으로 글자를 새긴다는 행위는 그저 옛 일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히 기술 전수의 단절이 치명적입니다. 대부분의 서각 장인은 고령자들이고 젊은 장인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서각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수년간의 수련과 반복이 필요하고 시력과 손 감각의 유지가 필수입니다.

하지만 후계자 양성에 대한 공공 지원은 부족하고 문화재나 미술 분야에서도 서각은 외곽에 머물러 있습니다. 서예나 도예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적 가치는 높지만 대중적 관심이 적은 분야이기에 이 전통은 점점 더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사찰과 서원마다 활발히 운영되던 서각 공방도 대부분 문을 닫고 있습니다. 장인의 수가 줄어드는 만큼 남아 있는 목판들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단순히 기술 하나가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기록문화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전통 서각은 문자와 문화를 연결하는 접점이자 공동체의 기억을 나무 위에 새기는 유일무이한 가치 있는 전통입니다.

 

서각을 현대로 다시 불러내기 위한  움직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불씨는 남아 있습니다. 일부 젊은 예술가들이 서각을 조형 예술의 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영역에서 다시금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각의 정갈한 선, 나뭇결과 먹의 조화는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느린 아름다움으로 부각되고 있고 일부 출판사와 전시기획자들은 서각판을 복원하거나 이를 활용한 아트북 출간을 시도함으로써 대중적 연결고리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몇몇 문화재청 지원 사업과 지역 문화센터 대안예술학교에서는 서각 장인과 함께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각의 기술만이 아니라 문자를 다루는 섬세함과 정신성까지 전승하고자 하는 의미 있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비문 해석, 고전 텍스트 복원, 지역 사료 재인쇄 등 서각을 기반으로 한 살아 있는 역사 복원 시도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도구와 손 사이, 시간과 기술이 교차하는 자리

글자 하나를 새기는 데 필요한 칼질은 많게는 수십 번에 달하며 칼의 각도나 힘의 세기는 미세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장인들은 이를 손끝의 기억이라 부릅니다.

또한 나무의 종류에 따라 칼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오동나무처럼 부드러운 결은 미세한 터치로도 형태가 살아나지만 배나무나 대추나무처럼 단단한 목재는 칼날이 미끄러지기 쉬워 숙련된 기술이 요구됩니다. 인쇄 후 먹이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인면 정리도 중요한 작업 중 하나입니다. 이는 칼보다도 더 섬세한 정성이 요구되며 이 공정을 통해 인쇄의 선명도와 지속성이 결정됩니다.

서각 장인의 기술은 단순한 조각이 아닌 문자 조형과 감각 조절, 재료 이해를 아우르는 총체적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전통 서각장인의 기술은 결코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으며 시대를 통틀어 기록자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습니다.

 

디지털 시대에서 전통 직업 서각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텍스트를 클릭하고 복사하고 검색하는 데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속도감 속에서 서각처럼 느리고 섬세한 기술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디지털 시대일수록 손으로 만든 것의 감동은 더욱 강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특히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한 디지털 환경에서는 서각처럼 명확한 흔적을 남기는 수공예가 더 큰 가치를 지니곤 합니다.

서각 장인들의 작업은 디지털 아카이빙 VR 전시 인터랙티브 북 콘텐츠 등으로 확장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실제로 일부 박물관과 대학에서는 고판화의 3D 스캔 자료를 활용해 가상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고 이는 교육 문화 콘텐츠와 접목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각판 자체를 활용한 예술 협업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캘리그래피 작가와의 공동작업 혹은 전통 회화와의 융합 등도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는 서각이 고루한 전통이 아니라 여전히 창의적으로 확장 가능한 장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무에 새긴 기록 다음 세대를 기다린다

전통 서각 장인의 기술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어떻게 지식과 신념을 남겼는가에 대한 문화적 증거입니다. 말이 아닌 손으로 전해진 기록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사람의 온기를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것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말없는 기록자들의 목소리는 다시 울릴 준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나무 위에 글자를 새기고 인간이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가장 순수한 본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손끝에서 아직 식지 않은 불씨를 바라보고 그것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전통 직업이란 단지 오래된 기술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질문에 전통으로 답하는 사람들의 선택입니다.

전통 서각 장인은 그 선택을 손끝으로 말해왔고 고요한 나무 위에 새긴 글자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묵직한 울림으로 되살아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들의 손길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 세대가 나무 위의 역사를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전통 서각 장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해야 합니다.

사라져 가는 전통 직업이 다시금 숨 쉴 수 있도록 관심과 기록 그리고 실천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